아름다운 추억속의 스페인
박시* 님 ・ 2020-02-23
마드리드와 톨레도에서
마드리드에 도착하자 신선하고 먼지하나 없는 청정 하늘이었고 거리는 모든 것이 작품이었다. 첫번째
방문지인 Prado 미술관의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거작은 가히 볼만하였다.
마드리드 기차역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듯 예술적이면서 녹색 식물이 있는 것이 상쾌하였다. 톨레도에서
묵은 호텔은 톨레도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천혜의 전망대이기도 하였다. 호텔 건물은 보와 받침이 통나무로
되어 있고 벽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었으며 내부 벽은 하얀 석회 가루로 칠하였다. 이는 스페인의 전통적인
스타일이며, 내가 과거 해외 출장을 수없이 다니면서 최고급 호텔에도 많이 묵어 보았지만, 이렇게 마음에 드는 호텔은 처음이었다.
톨레도 대교회는 신기하였으며, 건설하는데 거의 200년이
걸렸고 내부는 매우 인상적이고 부유한 귀족들의 영향력에 따라 내부 설계 및 장식 변경을 하는 횟수가 많았다고 한다.
톨레도의 도시는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런 마을이고 길은 마치 미로처럼 만들어져 있어 적의 침공을 방어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그 자체가 요새여서 일단 적이 도시에 들어가면 출구를 찾기가 매우 어렵고 톨레도의 군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드리드에서 세비아를 고속철로 이동하는 동안, 바깥 풍경은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태양이 조화를 이룬 푸른 언덕과 들판을 보여주는 데 나를 평화롭게 만들고 힘든 일들로 부터 해방되게 해주어
모든 것을 잊게 하였다.
세르비아에서
늘 그렇듯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햇빛이 너무 강렬하고 하늘은 몹시 맑았다. 우리가 택시로 간 곳은 미국과의 화해를 축하하기 위해 만든 "스페인 플라자" 건축물이였다.
스페인의 역사에 대한 여행가이드의 설명은 길더라도 그 장소에서는 이해할 수 있던 것 처럼 여겼지만, 스페인어로
된 지명 때문에 이름과 장소를 외우기가 매우 어렵고 혼동되었다.
스페인의 GDP 일부(12%)는 관광산업에서
얻고 있으며, 그들은 조상의 유물과 건축물과 그림에 감사를 표해야 하는 반면, 한국은 두뇌와 육체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돈을 얻을 수 있다.
스페인이 4대륙,-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를
석권, 석양이 지지않는 거대한 왕국의 자부심을 갖고있는 기간은 길었어도, 스페인이 단계적으로 쇄락하는
데는 불과 몇 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과거에 어떤 다른 대륙도 유럽 예술가의 위대한 예술품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노력이 없는 수입을 가져다 주고, 그들을 게으르게
만들 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스페인 상점, 사무실, 식당 등은 점심을 2시간이나 가지며 또, 저녁은 8시부터 시작하는데, 휴식과
함께 삶을 즐기는 듯 보이며 이는 한국인들에게는 그들의 그런 생활 패턴을 부러워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한 가지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절대적으로 잃게 되고, 이제 스페인의 경제는 점차 아시아의 새로운 개발 도상 국가들에게 뒤쳐지게 될 것이다.
론다에서
오늘 일정은 버스를 타고 세비아에서 그라나다로 이동하므로 그리 힘든 여정은 아니었다.
그라나다로 가는 길에 우리는 론다에서 휴식을 취했는데, 그곳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스페인 내전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
도시였고, 헤밍웨이는 전쟁에 참가했다.
유럽의 천성은 예술과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는 기타리스트의 공연이나 노래를 어느 거리에서나 볼 수 있고 심지어 이름 없는 길거리
기타리스트의 연주는 부드럽고 인상적이며, 나는 그의 모자에 약간의 돈을 넣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투우는 과거 스페인의 인기 볼거리 중에 하나였지만, 투우는 동물 애호가들로부터 가끔 비난을 받고 또한 투우사의 인명을 잃게 하여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내일의 관광은 기대되고 이번 스페인에 대한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라나다에서
나는 알함브라 궁전에 들어가기 전에 많은 것을 기대했고, 정원은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분수와 연못은 궁전 장식에 아주 좋은 조화였다.
그것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설계되고 지어졌으며 그들은 1492년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에게
그것을 양도하기 전까지 오랜 기간 동안 부귀와 영화를 누린 장소이기도 하다.
유럽인이 지은 교회와 같은 조각과 그림은 없지만
벽면의 문양이나 문자는 단순한 예술품이 아니며, 짙은 푸른 빛을 띤 기와가 서양에 처음 소개된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 관광이 끝난 후 점심에 소스를 곁들인 스테이크와 살짝 데친 문어를 먹었는데, 너무
이국적이고 부드럽고 흥미로운 맛이었다.
유럽인의 요리법은 화려지도 않고 맵지도 않으며, 여러 가지 과일과 야채가 섞여 있어서 아주 부드러운 것 같다.
바로셀로나에서
스페인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의 바르셀로나는 지난 200년
역사와 잘 조화를 이루며 멋지고 잘 정돈된 모습으로 나에게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지중해 연안 식당에서
먹었던 저녁 식사는 오븐에 구운 바닷가재와 새우, 문어, 홍합, 전복과 특별한 소스를 곁들인 해산물 요리로 아주 맛있고 신선했다. 불빛이
뚜렷이 보이는 도시의 밤거리는 고전적인 건물과 기념물 그리고 악기 연주자들이 즐비한 낭만적인 거리었다. 20세기
천재 건축가인 가우디는 불후의 가우디 대 성당을 설계한 것이 기념비적인 작품이며, 이 작품은 나를 놀라운 세계에
빠트리고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의 건축은 영감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그의 설계도는 불탔고, 후배 예술가들은 그의
숨겨진 교회의 축소 모형을 발견해서, 1923년 이후로 여전히 건축되고 있는 건물과 조각품들을 구체화할
수 있었으며, 성당 내부는 경이 그 자체였다.
그러한 놀라운
예술을 창조한 유럽인들의 힘은 자유주의적이고, 또한 자유형 교육 프로그램에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오늘 밤, 나는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 건축물인 까타류냐 음악당에 갔었는 데, 중세 시대의 귀족들이 즐겼던 곳으로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음악 소리는
나를 낙원으로 이끌었으며 연주자들은 자신들의 공연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나의 시선을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아직도 베토벤 연주 음악이 조용히 귓전을 맴돌고 있다.
피카소 미술관과 구엘 저택에서
피카소는 어린 소년 시대와 그의 초기 단계에서 실물을 사진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런 후
그의 스타일은 점점 이상한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가 70세
때 그의 그림은 어린이의 스케치와 같았고 그의 화려한 시절에 그린 그림은 그가 화폭에 무엇을 표현했는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스페인 사람들은 피카소의 그림을 매우 자랑스러워 하며, 사실 그는 공산주의자로 그의 명성 덕분에 삶은 매우 풍족했다. 3-4세의 어린 아이들은 그림 앞에서 어떻게 페인트 칠을 하고 표현하는지에 대해 선생님한테 교육을 받고, 그들의 유명한 고인이 된 화가의 사진을 통해 자연히 예술에 대해 습득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주기적으로 위대한 천재 화가의 탄생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우디가 디자인한 아주 부유한 자산가인 구엘 저택은 가우디의 초기 건축물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저택으로, 재 활용 재료를 사용하여 매우 효율적이기도
하다. 유럽의 음식과 거리, 사람들은 나에게 기억과 같은
꿈을 주고 언젠가 다시 오도록 상기시키는 독특한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마다 그것이 너무 짧고 달콤한 기억이었고, 물론 그것은
나의 지친 몸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재 충전시켜준다는 것을 느낀다.
바로셀로나에서의 마지막 날
아내는 오늘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쇼핑할 생각이었고, 우리는 스페인에서 판매 가격이 한국의
절반도 안 되는 올리브 오일 매장에 갔다. 역시 모두 한국인들로 차 있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2만 보 가까이 걸었고 그래서 밤에는 발이 부풀고 발바닥이 아팠지만, 이는 피를 순환시키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 가장 좋은 운동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상파울로 병원은 마치 궁전처럼 장식되었고 아주 훌륭한 건축물이었으며, 모든 의사들이 이 병원에서 일하고 싶어할 것이다. 특히 화장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좋은 이미지와 기억이 공항에서 무너졌다. 세금을 환급하기 위해 "글로벌 외환은행(Global Exchange Bank)"에서
일하는 한 직원은 내가 유로화를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원화로 지불했다. 하지만 교환 금액은 훨씬 적었고
나는 적은 돈을 환급받는 것에 대해 항의했다. 그녀는 그들의 은행 수수료가 25%라고 대답했지만, 그녀의 매니저는 화가 잔뜩 난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환급 영수증을 보여주었는 데, 1,300원을 859원인
비정상적인 환율로 계산해 원화로 환불을 한 것이었다. 마침내 매니저는 나를 유로화로 환불했고 6%의 수수료를 공제했다.
스페인! 그들은 오래 전에 과거의 영광을 즐기고 싶다면 그들의 마음을 초심으로 바꿔야만
할 것이다.
만약 그들의 속임수가 레스토랑과 가게, 공항 등에서 일어난다면 나는 다시는 스페인에 오지
않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것은 아내가 서로를 아끼는 영원한 친구라는 점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내 집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이라는 것을 깨 달았다.
Kae님에게 감사
사전에 꼼꼼하게 호텔과 식당, 입장 관람까지 한도 놓히지 않고 프로의식을 가지고 리드해준게 인상적이고, 우리 부부만 하루 더 묵고 출발했음에도 일요일 오후에 배웅까지 나와 준것에 대해 인상 깊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어 바로셀로나를 방문하게 된다면, 멋진 레스트랑에서 따뜻한 식사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